신경쇠약에 걸린 한 사내가 길거리에서 완벽한 형태의 레몬을 구해들고 롯데월드로 향하다. "〈레몬〉은 오직 한 남자의 독백으로만 이루어진 1인극이다." (2018년 제23회 인디포럼)
프로그램 노트
〈레몬〉은 오직 한 남자의 독백으로만 이루어진 1인극이다. 벽에 기댄 채 주저앉은 남자는 누군가에게 호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멍한 눈으로 마치 어딘가에 사로잡힌 듯 말을 뱉어낸다.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못 버틸만한 괴롭고 우울한 상태인 것 같다. 그가 들고 다니는 하얀 깃발에는 검은색으로 ‘나’라는 글씨만이 크게 쓰여 있다.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몰골이다. 카지이 모토지로가 1925년에 발표한 동명의 단편소설이 원작이다. 감독은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를 오랫동안 꿈꿨다고 한다. 인물이 내뱉는 대사나 상황의 기본 뼈대는 소설과 동일하다.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인 소설 속 1인칭 화자의 서술을, 인물의 대사로 옮겨온 것은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배가한다. 일본 교토의 거리를 헤맨 소설 속 화자처럼, 영화의 남자는 서울 도심의 거리 곳곳에 정박한다.
그런데 도시의 산책자처럼 보인 소설 속 화자와는 달리, 영화 속 화자가 떠도는 모습에는 빈곤의 풍경이 스민다. 친구 집을 전전하거나, 때로는 거리에 드러누운 인물의 마음 둘 곳 없는 처지는 오늘날 만연한 홈리스 혹은 현대판 떠돌이들을 은유하는 것 같다.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레몬은 폭탄의 은유다. 원작에서 1인칭 화자가 레몬을 설치한 장소는 대형 서점이었는데, 이현지 감독의 영화에서 레몬이 설치된 장소는 놀이동산, 롯데월드다. 누구나 어린 시절의 향수를 느낄만한 대중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설정하면서 영화는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다만 누군가 어린 시절 추억이나 향수, 혹은 꿈과 환상을 쓰다듬을 공간이 화자에게는 뒤섞일 수 없는 불화의 공간이 된다. 롯데월드 캐릭터 로리의 손에 은밀히 쥐어진 레몬은 마냥 심각한 위협, 혹은 비판을 내재한 것만이 아니라, 귀여움 혹은 유머러스함이라는 이질적인 감정을 영화에 불러오는 요소다. 감독은 롯데월드에 끼어든 레몬처럼 자신의 작품이 모토지로의 원작에 대하여 레몬이기를 고대하는 것도 같다. 소설의 세계 속으로 뚫고 들어가려는, 혹은 자신의 영화 세계로 원작을 초대하려는 감독의 뚝심이 빚은 독특한 작품이다. (2018년 제23회 인디포럼/ 김소희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