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치치(恥恥)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치치의 시간은 끊임없이 치치를 침범해오는 ‘다른’ 시간들로 인해 중단되고, 치치는 때로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다. (2018년 제23회 인디포럼)
프로그램 노트
‘소리 없는 말’들이 주는 편안함- 은 무엇에 기인할까? 소리 있는 말들은 수시로 접하지만, 내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소리 없는 말’들을 접할 기회는 흔치 않다. 텍스트화된, 혹은 녹음된 그것들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그러한 간접적인 방법이 소위 자동기술법에 의한 기술/구술이었다면, (거기에 이미지까지 유사한 방식으로 병치된다면,) 상대적으로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의 ‘소리 없는 말’들에. ‘소리 없는 말’들은 예측 가능한 형태로 가지런히 스스로를 드러내기 보다는, 내/외부 자극에 의해 촉발되거나, (영혼을 ;;) 잠식하는 형태로 존재하는 듯하다. 또, 차분히 정렬된 마음보다는, 억압되고 불안하여 해방구를 찾아 소용돌이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치치>에서 ‘치치’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화자(김현정 배우)의 표정과 몸짓은 후자와 가까워 보이며, 자막으로 빠르게 미끄러지는 말들과 이미지들은 이러한 상태/분위기를 증폭시킨다. 빠른 속도로 연쇄작용(예컨대, ‘치치’라는 이름 또한 이런 연쇄작용의 산물인 듯, 후반부 ‘교회에서 치- 하고 재채기를 한 ‘나’는, 도입부에서 ‘치치’라는 이름과 연계되고, 또 그러한 내용을 전달하는 ‘소리 없는 말’- 자막은, ‘새장 속 새’ 이미지와 어우러지며, 새들을 지칭하기도, 새들과 화자를 연관시키기도)을 일으키는 이미지 조각들과 ’소리 없는 말‘의 조각들, 앰비언스의 오르내림은, 발화되지 못한 것의 파편들로는 불안하게 존재하지만, 신기하게도 총체로써의 그것은, 편안함을 준다.
뱉어졌기 때문일까? 뱉어짐으로써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들을 만지고, 바라보고, 재배치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편안함은 단순히 관객으로 갖게 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일 뿐인가? 알 수 없다만, 분명한 것은 앞선 언급처럼, 다른 누군가의, ‘소리 없는 말’들에 근접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는 것. 월식과 같은 현상을 통해 달의 존재를 새삼 인지하듯, 다른 누군가의 ‘소리 없는 말’들에, (짧은 순간이나마) 근접할 수 있는 기회를 통해, 혼자가 아님을 새삼 인지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아니면, 자기 자신의 그것들과 마주하게 되거나. (2018년 제23회 인디포럼/ 이완민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