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남자가 자위를 끊으려고 하다가 실패하는 이야기. "자정작용. 먼저 적어둔다. 여기서 일어나는 가장 대표적인 운동은 (자위 운동이 아닌) 자정 운동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18년 제23회 인디포럼)
프로그램 노트
자정작용. 먼저 적어둔다. 여기서 일어나는 가장 대표적인 운동은 (자위 운동이 아닌) 자정 운동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더러움〉에서 화살은 자기 자신을 향한다. 이 때의 자기 자신은 영화일 수도, 연출자일 수도, (박준성 감독/배우가 연기하는) ‘남자’로 칭해지는 극중 인물/화자일 수도 있다.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던 내레이션은 도입부를 지나오며 사라지고, ‘음란함, 게으름, 분노’로 대변되는 ‘나’가 스스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나’는 때로는 복수의 형태로 존재한다. 정자 아래 복수의 ‘나’가 대화하는 장면은, 물리적으로 두 명의 ‘나’가 한 화면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치열한 두 ‘나’의 대화는 그 대화의 내용에 따라 투 샷 또는 원 샷으로 달리 담긴다. 개인의 악마성이 결국 문제라는 ‘나’는, 페미니즘, 노동운동과 같은 모든 움직임들이 결국 서로 상처받지 않으려는 노력 아니냐고 열변한다. 반박하려던 ‘나’는, 모기가 얼굴에 내려앉는 바람에 입을 열지 못한다. 이어지는 것은, 모기 앉은 ‘나’의 얼굴 정지화면 -> 열변하던 ‘나’의 얼굴 정지화면 -> 자위하는 ‘나’의 얼굴 정지화면. (시스템과 같은 용어로 대변되는) 거대 모순을 다루기에 앞서, 화자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 익살스런 클로즈업으로 화자의 몸을 훑던 카메라는 조금씩 관찰의 반경을 넓히기 시작한다. 집 밖으로 나선 화자는 골목골목을 헤집기도, 돌을 던져보기도, 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균열’을 일으키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주변 인물들과의 만남에서 감지되는 것은 열패감, 쓸쓸함, 상대에게 주는 불편함. 화자는 나뭇가지로 돌담을 내리치고, 흡연중인 고교생들에게 시비를 거는 방식으로 자존감을 회복한다. 영화는 그런 그의 모습을 집요하게 관찰한다. 그렇게 안을 향한 채 조금씩 반경을 넓히던 영화/카메라가, 어느 순간(화자를 매개하지 않은 고교생들의 이미지 – 스마트 폰으로 동영상을 시청하는)에 이르러 밖으로 향한다. 사람들의 움직임 – 개별적이거나 집단적인, 하고 있는 것들, 하고자 하는 것들을 보여준다. 이미 한 차례 안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일까? 자기검열 탓일까? 카메라는 먼발치에서,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후반부에 이르러 화자는 생각의 전환을 시도하며 (신과) 자문자답한다. 자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지만, 이는 다른 논리에 의해 꺾이고, 조용히 하라는 이웃의 항의에 의해 중단된다. 영화는 코믹하고도 자조적인 톤을 시종일관 유지하면서, 환멸과 화해 사이를 끊임없이 운동한다. 스스로 참외를 깎아, 먹고, 스스로 연필을 깎아, 쓰는, 화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혁명은 자기 자신과의 화해로부터 시작한다던 혹자의 말이 뜬금없이 떠오른다. 기우였을까? 영화를 어떻게 두둔(?)할 것인가 고민했던 것은? 도처에 존재하는 ‘게워내려는 시도’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더러움〉으로 하여금, 고정되지 않은, 운동하는 형태로 존재하게 한다. (2018년 제23회 인디포럼/ 이완민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