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스릴러, 드라마 감독 히로스에 히로마사
등급 청소년관람불가 러닝타임 92분 국가 일본 조회수 오늘 1명, 총 7명
줄거리
사고로 반신 불구가 된 게이코는 삶에 대한 의지를 잃었다. 그녀는 이제 남편 칸자키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들의 절친한 친구인 나가미야는 그들의 사정이 딱하다. 그는 이 상황에 서 게이코를 포함한 모두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러던 그는 우발적으 로 케이코를 목 졸라 죽이게 됨으로써 그 방법을 찾게 되고, 그 스스로 이를 존귀한 죽음이 라고 확신한다. 게이코의 동생 하수미는 나가미야를 납치하여 아파트의 방에 가둔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결국 절박한 심정으로 그녀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기묘한 질문을 올린다. ‘나는 내 언니를 죽인 남자를 가두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 습니다. 제안을 부탁드립니다.’ 다양한 방문객들이 아파트에 찾아 들면서 이 전략은 성공한 듯이 보인다. 어떤 사람은 나가 미야를 재판하듯 다루고, 어떤 사람은 구경을 하러 온다. 종교인인 여인이 있는가 하면, 살 인자가 될 기회를 엿보는 소년도 있다. 게이코의 동생 하수미는 감시 카메라를 통해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고, 칸자키 는 갇힌 나가야마를 계속해서 돌본다. 각각의 방문객을 맞이하면서 그들의 죄책감은 점차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2007년 제1회 시네마디지털서울)
연출의도
당신은 분명 이 영화를 친근하게 느낄 것이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영화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가 관람객을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 속에서 자신은 어떤 입장에 있는 사람인가,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인가, 그 결과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지점까지 이끌어가는 작품이 된다면 기쁠 것 같다.
리뷰
이 황당하고 끔찍한 이야기는 사실 하루에도 몇 번씩 뉴스를 장식하는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논쟁의 한 가운데에 들어섬으로서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문제들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한꺼번에 제기하고 있다. 친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반신불구가 된 친구의 아내를 죽인 남자와 그 남자를 납치하여 복수를 감행하는 여자의 여동생, 그리고 이를 심판하며 구경하는 사람들. 감독은 그 누구의 입장에 서거나 어느 한쪽에 순결성을 부여하는 대신, 이들이 서로의 피를 빨아먹으며 생존하는 흡혈귀처럼 교묘하게 얽혀있는 지점을 파헤친다. 고통을 중지시킬 능력조차 없는 이들을 대신해 그 고통에 영원한 죽음을 선사하는 일은 변명될 수 있는가. 법을 대신한 사적 복수는 얼마나 정당한가. 이쯤 되면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 특히 <친절한 금자씨>의 폐교에서 벌어지는 심판과 복수의 장면이 떠오른다. 그러나 <꽃노래의 도둑>은 훨씬 거칠다. 카메라는 폐쇄된 좁은 공간 안에서 손발이 묶여 고통 받는 남자와 그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오가며 투박하고 생생하게 찍는다. 남자를 납치 감금한 여자가 방 안에 설치된 CCTV로 상황을 훔쳐보듯, 인물 가까이로 거침없이 접근하는 디지털 카메라 덕택에 관객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몰래 카메라의 또 다른 시청자가 될 수 있다. 아마도 이는 감독의 명백한 의도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이렇게 질문한다. ‘이것을 보고 있는 당신의 위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하여 복수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제기에 사이버 문화의 폭력성에 대한 사유가 개입된다. 마치 동물원의 동물을 쳐다보듯 납치된 남자를 관찰하는 익명의 심판자들은 실재와 가상을 구별하지 못한다. 정확히 말해 구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여기에는 어떤 무시무시한 호기심의 쾌락과 희열이 있다. 그들은 망상 안에서, 인터넷이라는 정글 안에서,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며 점점 더 자기 안으로 침잠한다. 감독은 영화 속 인물들과 그들을 보는 관객이 가해자, 피해자, 공모자의 세 가지 위치를 끊임없이 오가게 만듦으로서 과연 누가 이들 사이의 경계를 확신할 수 있냐고 묻는다. <꽃노래의 도둑>은 최첨단 문명의 수혜자들에게 ‘본다는 것’의 선정성과 그것의 윤리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카메라 밖의 ‘나’의 시선과 처절한 복수극 밖의 ‘나’의 자리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그 질문의 바탕에는 사실 순결한 구경꾼이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다는 감독의 맹렬한 주장이 자리하고 있다. (2007년 제1회 시네마디지털서울 - 남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