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드라마 감독 자오 예
등급 15세이상관람가 러닝타임 95분 국가 중국 조회수 오늘 1명, 총 5명
줄거리
광시현의 변두리 작은 마을 한 가족이 살고 있다. 가족은 마을 고등학교의 선생님인 엄마 와 중학교 3학년인 형 마우지아 그리고 신장수축증으로 지속적인 수혈과 약물치료가 필요 한 초등학교 3학년인 동생 마우딩 이렇게 세 사람이다. 학교에서의 마우지아는 훌륭한 운동 선수이다. 하지만 동생에게 계속 수혈을 해줘야만 했 던 마우지아는 1등도 할 수 있었던 학교 운동회에 참가하는 것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마우지아는 그런 사실을 후회하기보다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윤리적인 사회와 엄격 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난 그는 늘 가족을 자신보다 중요시하고 참는 것을 배우며 자라왔 다. 가끔 위태위태할 때도 있지만 마우지아는 항상 제자리로 돌아온다. 하지만 어리고 버 릇 없는 동생 마우딩은 가족들이 겪는 어려움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그의 병 을 마치 무슨 놀이인 것처럼 생각하며 병원을 놀이터로 여긴다. 병원의 모든 사람들은 그 의 말을 들어야 하고 모두들 그를 잘 돌봐 준다. 그러면 그럴수록 마우딩은 점점 더 버릇없 이 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던 엄마가 쓰러지고, 암 말기라는 재난 같은 진단 을 받게 된다. 모든 책임을 고스란히 혼자 떠맡게 된 마우지아는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 기 위해 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마우지아는 동생에게 계속해서 수 혈을 해줘야 하고, 또 심지어 어머니의 부탁으로 철도 위에서 장난을 치다 사고로 손가락 이 잘려나간 동생에게 자신의 손가락 두 개를 이식해주기까지 한다. 이 모든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마우지아는 아직 쓰러지지 않는다. 그는 아직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 언젠가 모 든 게 잘 될 날이 올 거라 믿는다. 하지만 어느 날 마우지아의 그 믿음과 희망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다. 마우지아는 우연히 오래된 편지 속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그의 어머니가 입양한 아이를 안고 있는 오래 된 사진이다. 그 사진 속의 아이는 바로 마우지아 자신이다. (2007년 제1회 시네마디지털서울)
연출의도
완성된 영화는 그 시절 내가 느낀 감정들과 많은 관련이 있다. 창의적으로 말하자면, 마우지아와 나는 서로를 선택했다. 이 영화는 우연적잉라 할 만하다. 극적 구조에 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광시현의 핑샹으로 갔던 나는 그 작은 도시가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친밀한 느낌을 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야기 자체는 광시현과 아무 상관도 없지만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으며, 영화가 표현하고 있는 일들은 실제로 핑샹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곤 한다. 나는 자유를 추구한다. 나는 지속적으로 구속되어 있다고 느끼고,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그렇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이러한 느낌의 영향으로 나는 마우지아와 자연스레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내 영혼의 일부를 그에게서 본다. 그에게서 나의 일부분이 드러난다. 하지만 나는 그가 마지막에 한 행동을 따라 할 순 없다. 어떤 대상들에 대해 그가 가진 열정이 내게는 없다. 내게는 아직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나는 영화를 통해서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 나는 마우지아가 눈부신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고 그것을 믿고 사랑한다.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그의 선택이다. 우리는 그에 대해 간섭할 권리가 없다. 그가 치르는 죄값도 그의 선택일지도, 아니 어쩌면 그는 한번도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그의 매력이다. 그는 15세, 매력적인 소년이다.
리뷰
‘성장영화’라는 이름조차 사치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영화들이 있다. 현실의 무게는 좀체 가벼워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 현실을 감당하고 견뎌내는 소년의 인내력만이 점점 더 강해지는 이야기들.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른다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이를테면 후 샤오시엔의 <연연풍진>,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 같은 영화들 사이 그 어딘가에서 <마우지아>는 서성인다. 이것은 소년 마우지아의 끝없는 희생기이다. 영화는 희생이 삶의 습관이 되어버린 듯 매우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일부분을 버려가는 이 가련한 소년을 바라본다. 소년은 공장에 나가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아픈 동생에게 수혈해주기 위해 달리기를 포기하고 동생의 절단된 손가락을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절단한다. 이는 소년의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라 삶이 소년에게 강제한 단 하나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엄마도, 버릇없고 철없는 동생도 모두 그럴 수밖에 없는, 달리 다른 길이 없는 벼랑 끝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 빈곤한 가족과 이 삶의 ‘어쩔 수 없음’이 보는 이를 더없이 슬프게 만든다. 왜냐하면 누군가 죽지 않는 한, 여기서는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출구가 도무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단 하나의 희망의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소년의 꿈을 실은 커다란 새 형상을 한 연(kite)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유일한 희망마저도 소년의 환상 속에 가둔다. 아무리 소년이 달리고 또 달려도 연은 땅 위로 좀처럼 날아오르지 못하고 철길 위에 찢겨진 채 앙상한 뼈대를 드러내거나 언제나 땅으로 돌아오고 만다. 이는 영화 속에 삽입된 작은 동물들의 이미지와도 연결된다. 땅 위에 널브러진 곤충, 천천히 죽어가는 작은 새,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항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거북이. 훼손된 몸으로 고통을 당하며 점차 희미해져가는 이들 존재의 부서짐은 소년의 운명을 그대로 비춰주는 암담한 거울이다. 소년이 죽어가는 동물들을 그저 쳐다보기만 하는 것처럼, 소년의 희생을 담보로 살아가는 가족들과 그걸 지켜보는 관객들 역시 소년의 고통 앞에서 무기력하다. 영화는 창문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듯, 느린 호흡으로 끝까지 관찰하려고 한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베일을 벗은 진실과 너무도 충격적인 소년의 마지막 선택 앞에서 카메라의 고요하고 무기력한 응시는 처참히 깨져버린다. 우리는 이 선택의 윤리에 대해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선택의 ‘어쩔 수없음’에 대해 강변하고 연민할 것인가. 이것은 희생의 가장 비극적인 결말이다. (2007년 제1회 시네마디지털서울 - 남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