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50년의 침묵이 깨진다!
1965년 인도네시아 군부정권 대학살의 기억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람리’라는 이름은 곧 학살을 의미했다. 그는 비밀리에 사라졌던 100만 명의 사람 중 유일하게 목격당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알고도 모른 척 숨죽여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람리’의 또 다른 이름은 침묵이자 망각. 그러나 그의 동생 ‘아디’는 50년 만에 형을 죽인 살인자를 찾아가 그때의 이야기를 묻기 시작하고, 가해자들은 누구보다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자신이 저지른 소름 끼치는 살인을 증언한다. ‘죽음’은 있지만 ‘책임’은 없는, 인류 역사상 가장 고요하고 잔혹한 이야기!
화제의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을 연출한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신작 다큐멘터리다.
안경사인 ‘아디’는 인도네시아의 군부정권 시절 자신의 형을 잃었고, 50년 만에 형을 죽인 살인자를 찾아가 그때의 이야기를 묻는다. 가해자들은 누구보다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증언한다. 이 대학살은 많은 가족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공포에 사로 잡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진실’은 있지만, ‘죽음’에 대한 ‘책임’은 없다고 말하는 가해자들은 그저 눈을 가린다.
2015년 제6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엠네스티국제영화상을 수상했으며, 2014년을 대표하는 최고의 다큐멘터리로 평가받은 작품이다. (2016년 제4회 무주산골영화제)
줄거리
[ PROLOGUE ]
나는 왜 노래를 하는가
아픈 가슴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서 노래하지
어차피 끊어질 것을 알고 있으면서
무엇 때문에 물레에 실을 잣고 있는가
어차피 가슴만 아플 뿐인데
무엇 때문에 묻어 둔 기억을 들춰내는가
-<침묵의 시선> 중-
[ CHARACTER RELATIONSHIP ]
"저는 당신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에요.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려고 온 거예요"
아디
대학살의 피해자 ’람리’의 8번째 동생.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학살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는 가족의 모습과 대학살을 정당화시키며 가해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아디는 공포와 분노, 슬픔과 희망을 품고 직접 대학살 가해자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넌 형을 빼닮았어. 신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지.
네가 없었다면 난 미치고 말았을 거야."
로하니
’아디’와 ’람리’의 어머니. 친아들을 죽인 사람들과 한 동네에서 침묵하며 살아야 했던 인물로, 늘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있다.
"나는 왜 노래를 하는가. 아픈 가슴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서 노래하지"
루쿤
’아디’와 ’람리’의 아버지. ’람리’의 죽음 이후 끔찍했던 트라우마에 갇혀 자신을 늘 17살이라고 인식한다.
"공산주의자는 신앙심이 없어.
우리 이슬람교는 살인을 인정하지 않지만, 적은 죽일 수밖에 없지"
이농
’람리’의 살해에 직접적인 가담자.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에 대해 정치적인 의무였다고 믿는다. 대학살이 이루어졌던 장소에서 웃으며 살인을 증언하는 등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
"람리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겠지만, 우리가 어쩌겠어? 그땐 혁명의 시대였다고"
아마르 하산
’람리’의 죽음에 또 다른 가담자. 과거 자신의 행동은 더 좋은 역사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확신한다. ’이농’과 더불어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을 뿌듯해 하며 거침없이 증언한다.
"지금이 그때라면 자네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몰라"
아마르 시아한
과거 대학살의 살인 부대를 이끌던 사령관. 매일 밤 공산주의자들의 살생부에 사인을 하며 대규모 학살을 주도했다.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들이 저질렀던 일들을 영웅적인 투쟁이라고 말하며, 살인에 대해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
"백만 명이 죽었지만 그렇게 큰 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M.Y. 바스룬
대학살 살인 부대의 서기관. 현재 인도네시아의 지방 의회 대변인으로, 과거의 일은 정부가 시킨 것이 아니라 공산당을 싫어했던 국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그냥 지키기만 했지."
아디의 삼촌
대학살 당시, 공산당으로 몰려 끌려온 사람들을 수용소에 가둬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수용소에는 ’람리’도 투옥되어있었지만, 자신은 직접 살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때는 미친 사람이 아주 많았지. 다들 미치지 않기 위해 피를 마셨어."
삼실
대학살의 가담자. ’아디’와의 인터뷰에서 공산당이라 여겼던 중국인의 머리를 베어 중국인들을 놀라게 한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한다.
"아버지를 용서해주세요. 당신 아버지뻘의 노인일 뿐이니까요"
삼실의 딸
아버지는 공산당을 물리친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아디’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아버지의 만행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 ’아디’에게 대신 사과를 하면서도, 동시에 가족이란 이름으로 아버지에 대한 선처를 부탁한다.
"지난 일은 잊어요. 그때를 교훈 삼아 잘 지내면 되죠"
아마르 하산의 유족
’아디’와의 인터뷰에 불편함을 느끼고 심한 거부감을 보인다. ’아마르 하산’의 과거는 자신들과 상관없다고 말한다.
[ DIRECTOR’S NOTE ]
<액트 오브 킬링>은 공포와 거짓 위에 세워진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를 드러냈고, <침묵의 시선>은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그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침묵의 시선>에 두 명의 전 학살단 대장이 나를 북 수마트라의 스네이크 강둑으로 데리고 가는 장면이 있다. 그 강둑 빈터에서 그 둘은 자신들이 군인들을 도와 어떻게 만오백 명의 사람들을 죽였는지를 신이 나서 몸소 재연까지 하며 보여줬다. 그 장면 마지막에는 두 사람은 그곳에서의 행복했던 기억을 추억하며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 장면을 찍었던 당시는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끔찍했던 기억 중의 하나이고, 그것을 시작으로 나는 이 두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었다.
사실 나를 정말로 무섭게 만든 것은 학살 자체가 아니라 그 두 사람이 미리 만나서 말을 맞춘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 두 사람은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신나게 떠들며 자랑했고 거기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때 나는 이러한 거리낌 없음이 사회 전체에 만연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두 작품을 1965년에 발생한 사건에 대한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학살이 가져온 결과를 보여주는 현재에 대한 다큐멘터리’라고 말한다. 그렇게 나온 첫 번째 작품이 <액트 오브 킬링>이 되었고 이 다큐멘터리는 거짓으로 포장된 사회 속에 사는 가해자들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침묵의 시선>은 50년 동안 공포와 침묵 속에 살 때 사회 전체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말하는 다큐멘터리이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에 관한 영화는 대부분 그들을 영웅 같은 주인공으로 만드는 진부함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가해자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알고 있고, 현재의 우리는 그런 끔찍한 재앙과는 무관한 안전한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우리는 가해자들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편’이다라는 안도감을 가지려고 생존자를 영웅으로 그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기 위해 생존자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존자들의 뼈 아픈 과거를 모욕하는 짓인 동시에 재앙 속에서 살아남아 폭력 속에 갈가리 찢긴 삶을 유지하며 공포 속에서 침묵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흔한 진부함 속에서 똑바로 길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침묵 그 자체를 들여다봐야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침묵의 시선>은 공포 속의 침묵에 대한 한 편의 시이다. 그 시는 침묵을 깨야 하는 필요성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침묵이 깨졌을 때 드러나는 고통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 영화는 침묵에 대한 기념비일지 모른다. 그 기념비는 우리에게 아무리 우리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를 원하고, 외면하고, 다른 일로 덮어버리고자 하더라도 파괴된 것은 원상 복귀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우리는 나아가는 것을 멈춰야 한다. 멈춰서 파괴된 삶을 알아차리고, 그 파괴된 삶이 가져오는 침묵에 안간힘을 쓰며 귀 기울여야 한다.
[ ABOUT MOVIE ]
2014 베니스국제영화제 5관왕 석권!
전 세계 37개 영화상을 휩쓴 전대미문의 마스터피스!
<침묵의 시선>의 경이로운 수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 세계 70개 이상의 영화상을 휩쓸며 해외 유력 매체와 평단의 극찬 세례를 끌어낸 <액트 오브 킬링>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이 이번엔 그보다 더욱 대담하고 과감한 신작 <침묵의 시선>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세계 영화계에 거대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침묵의 시선>은 1965년 인도네시아 100만 명 대학살 사건으로 형을 잃은 ‘아디’가 50년 후 자신의 형을 죽인 사람들을 찾아가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는 도발적인 방식의 다큐멘터리로, 공개된 직후 전작 <액트 오브 킬링>을 이어 올해에도 역시 아카데미시상식 최고 다큐멘터리부문의 유력 후보로 점쳐지고 있다. 위험천만하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하며 해외 유력 매체와 평단의 폭발적인 찬사를 끌어낸 <침묵의 시선>은 2014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 국제비평가협회상, 인권의밤상, 골든마우스상, 유럽비평가협회상을 받으며 5관왕을 석권한 데 이어 2015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평화영화상을,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부산시네필상을 수상하는 등 일찌감치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37개의 영화상을 휩쓸었다. 그뿐만 아니라 2015년 토론토영화제 공식 초청, 텔룰라이드영화제 공식 초청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영화제로부터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고 있어 70개 이상의 영화상을 휩쓸었던 <액트 오브 킬링>의 유례없는 아성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올해 단 한 편의 영화를 본다면 이 영화를 보라!
현재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메이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충격적 문제작!
공포 속의 침묵에 대한 한 편의 시 <침묵의 시선>
국내 개봉 확정과 동시에 절대 놓쳐선 안 될 올해의 마스터피스로 씨네 필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침묵의 시선>은 단 두 편으로 영화사를 뒤흔들며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자리 잡은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충격적인 신작이다. 1965년에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났던 100만 명 대학살 사건에 대한 집요하고 깊이 있는 통찰로 ‘학살은 학살로서 직시해야 한다’는 사회적 화두를 던졌던 전작 <액트 오브 킬링>에 이어 이번 <침묵의 시선>은 학살이라는 참사 위에 세워진 거짓된 사회가 어떻게 찢어져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진실과 화해, 그리고 정의를 얼마나 바라는지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파렴치한 가해자에게 분노를 느끼도록 만들었던 <액트 오브 킬링>과는 달리 <침묵의 시선>은 분노하던 이들이 직접 일어나 행동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또 하나의 뜨거운 문제작을 가지고 나타난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을 향해 해외 유력 매체와 평단은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하고 강렬한 다큐멘터리다.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실로 깊은 통찰!(Errol Morris)”, "차라리 이 영화를 보지 말았어야 했다.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다.(Wall Street Journal)", “마음을 사로잡는 오펜하이머의 무한한 스토리텔링 능력(Playlist)”, “긴 밤 끊임없이 울리는 매미 소리처럼 머릿속을 맴도는 강렬한 영화(Peter Howell)”,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 진정한 예술작품!(Huffington Post)”, “절대 잊혀선 안 될 21세기 가장 중요한 다큐멘터리(Twitch)” 등 동시대에 만날 수 있는 가장 강렬하고 완성도 높은 다큐멘터리라는 찬사를 보냈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이 그간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침묵의 시선>은 현 정권을 고발하는 영화가 아닌 침묵을 강요당한 사람들에 대한 영화”임을 밝혀왔던 만큼, <침묵의 시선>을 통해 관객들은 단순히 감춰진 역사를 인식하고 분노하는 것뿐만 아니라, 알고 있었지만 두려워 피해왔던 진실을 바로 마주하고 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만약 지금이 그때였다면 저한테 어떻게 하셨을까요?”
피해자는 묻고, 살인자는 답한다!
50년의 숨 막히는 침묵을 깨는 위험천만 파격 인터뷰!
<침묵의 시선>은 안경사 ‘아디’가 친형 ‘람리’를 죽인 살인자들을 50년 만에 직접 찾아가 학살에 관해 묻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자칫 피해자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다큐멘터리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지만 <침묵의 시선>은 피해자의 ‘입장’을 그리며 감정적 동요나 동정을 구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의 시선을 빌려 학살로 인해 야기된 결과와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다. 주인공인 아디의 형 람리는 인도네시아 대학살에서 무척 중요한 이름이다. 소리소문없이 실종 처리되어 사라졌던 100만 명의 인물 중 유일하게 목격자를 가진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학살이 모두 끝난 후에야 태어난 아디는 모든 것이 망가진 가정 안에서 살며 학살로 인한 트라우마를 가져야 했지만, 그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쉽게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복수를 꿈꾸는 대신 차분하고 담담하게 가해자에게 당시의 학살에 관해 묻고 그들이 자랑스럽게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떠드는 동안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자신이 바로 그 학살의 피해자 가족임을 밝히는 순간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던 공포와 숨 막히는 긴장감이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온다. <침묵의 시선>은 살기 위해 침묵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그러한 사회를 외면하고 책임을 회피하던 이들로 하여금 50여 년의 침묵을 깨게 만드는 전례 없는 다큐멘터리로 묵직한 여운을 선사할 예정이다.
아이러니에서 기인한 기묘하고 아름다운 영상미,
정적인 이미지에 숨겨진 강렬하고 소름 끼치는 공포!
격정적인 감정의 파도를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다큐멘터리!
화려한 색감과 초현실적인 비주얼로 무장한 채 대학살을 재연하는 살인자들의 이야기로 감각적인 미장센을 선보였던 <액트 오브 킬링>과는 달리 <침묵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으로 정적미를 뽐낸다. 그러나 이러한 미학적 이미지를 앞세운 <침묵의 시선>은 피해자가 직접 가해자를 찾아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던 인도네시아 100만 명 대학살이라는 주제에 관해 인터뷰하는 파격적인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뜻밖의 공포를 선사한다. 조용한 밤에 울리는 풀 벌레 소리와 호젓한 시골 풍경, 그리고 단지 응시하는 듯한 카메라의 시선은 살아남은 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학살과 죽음의 공포를 비추고 아직도 인도네시아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폭력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이렇게 아름다운 영상 속에 숨겨진 소름 끼치도록 잔인한 이야기는 이미지와 메시지의 틈을 벌리며 그 모순에서 기인하는 독특한 분위기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특히, 생생하고 다채로운 색감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를 말없이 바라보는 아디의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시선이나,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아들을 떠올리며 과거 속에 갇혀 사는 노부모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도리어 뻔뻔하고 파렴치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가해자의 모습과 병치 되어 격정적인 감정의 파도를 불러일으킨다. 아이러니에서 기인하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영상미로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새로운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은 역대 가장 고요한 충격을 안기며 선명하고 강렬한 후유증을 남길 것이다.
[ DIRECTOR’S PRODUCTION NOTE ]
난 2001년에 인도네시아에 처음 갔다. 노동조합이 불법이었던 수하르토 독재 정권이 끝난 후 야자유 농장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세우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것을 도와주러 갔었는데, 북 수마트라 오지 마을에서는 이미 3년 전에 군부 독재가 끝났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1965년까지 활동적인 노동조합을 갖고 있었던 그들은 유난히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는 곧 그 공포의 원인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들의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이 공산당 찬동 자라는 누명을 쓰고 강제수용소에 감금당하고 결국에는 군인과 학살단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2001년 당시 살인자들은 면죄부를 받은 것은 물론이요, 의회에서부터 농장 마을회까지 요직을 갖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생존자들은 대학살이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 속에 살고 있던 것이다.
<글로벌리제이션 테이프>(2002)를 완성한 후 생존자들은 우리에게 어서 돌아가서 그들이 느끼는 공포의 근원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즉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권력을 누리며 사는 살인자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야 하는 생존자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한 것이다.
2003년 초 우리는 서둘러 돌아가서 농장 노동자들이 자주 입에 올렸던 1965년에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희생자의 이름은 ‘람리’였고, 사람들에게 람리라는 이름은 곧 학살을 뜻하고 있었다.
나는 람리에 대한 살인이 왜 그리 자주 언급되는지 곧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증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제 수용소에서 한밤중에 사라진 다른 수천수만 명의 희생자와는 달리 살인자들은 람리의 시신을 그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야자수 농장에 버리고 가버렸고, 그런 람리의 마지막 순간을 목격한 증인들이 있었다.
생존자들과 보통의 인도네시아인들이 람리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그의 죽음은 사라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증거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65년에 벌어진 학살이 아무리 금기시되었다 하더라도 람리는 살인이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의 죽음은 군부정권이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살라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협박하고 있다는 공포를 확인시켜주었다. 람리와 그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눈을 뜨고, 진실을 상기하고, 과거를 기념하고, 미래를 향해 경고해야 한다고 스스로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 생존자와 농장 사람들에게는 람리를 기억하는 것은 공포의 근원을 일깨우는 것이며, 그것은 그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첫걸음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내가 2003년에 인도네시아에 돌아갔을 때, 람리의 사건이 자주 언급될 수밖에 없었다. 농장 노동자들은 금방 그의 가족을 찾아주었고 람리의 어머니 로하니와 노쇠했지만 장난기 많은 아버지 루쿤, 그리고 학살 후에 태어난 막내아들 아디를 소개해주었다.
로하니는 아디의 탄생을 죽은 아들 람리가 다시 태어난 것처럼 여겼다. 아디의 존재는 그녀가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고, 아디는 평생을 부담감 속에 살았다. 학살 생존자들의 자식들이 그러했듯 아디는 정치적으로 깨끗하지 않다는 낙인이 찍힌 집안에서 지역 군인들의 금전적 강탈로 인한 빈곤함과 학살의 트라우마 속에 자라났다.
아디는 학살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학살에 대해 말하고 대답을 요구하는데 두려움이 없었다. 나는 그런 아디가 그의 가족이 겪었던 것을 이해하며 나아가는 방법으로 이 작품을 이끌어줄 것으로 생각했고, 그의 주변 사람들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에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던 공포를 표현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이 작품을 인도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바로 아디와 친구가 되어 함께 그 지역의 생존자 가족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우린 그것을 찍었다. 그들이 겪었던 것을 처음으로 입 밖으로 꺼냈던 것이다. 한 번은 생존자 한 명이 람리 부모님 집에 방문했는데 경찰에게 체포되어 노역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증언하기 위해 왔던 것이다. 매번 오토바이와 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촬영을 멈추고 장비를 숨겼다. 경제적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생존자들은 자전거 정도밖에 살 수 없는 경제 상황에 처해있었고, 자동차나 오토바이 소리는 곧 외부 사람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모든 마을에는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그 마을에 있던 군대는 재빠르게 우리가 하는 일을 알아채고 생존자들과 아디의 형제자매들에게 촬영에 협조하지 말라고 협박했다. 생존자들은 나에게 “그만두고 집에 돌아가기 전에 가해자들을 찍어주세요. 그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우리 친인척들을 죽였는지 말해줄 거예요.” 라고 말했다. 나는 가해자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과연 안전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해자 모두가 거리낌 없이 자기들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자기 가족이나 심지어 어린 손자 손녀 앞에서 웃음을 머금고 자랑하고 있었다. 침묵을 강요받는 생존자들과 생존자들이 말하면 범죄로 취급되는 그 일을 자랑스럽게 떠드는 가해자들 사이의 간극에서 나는 마치 홀로코스트 이후 나치가 아직도 권력을 쥐고 있는 독일에 있는 듯했다.
내가 찍은 증언들을 보고 싶어하는 아디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생존자들에게 그 영상을 보여줬을 때 그들은 나에게 “당신은 지금 엄청나게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요. 가해자들을 계속 찍어주세요. 사람들이 이걸 보게 된다면 살인자들이 세워놓은 썩은 정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생존자들과 인권 단체로부터 너무나 위험한 일을 이루어달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가해자들은 적극적으로 자기들이 살인을 저질렀던 장소로 나를 데리고 갔고 어떻게 사람을 죽였는지 자발적으로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소품으로 사용할 칼이나 함께 재연해줄 친구들을 데려오지 않은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불평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글로벌리제이션 테이프>를 만든 농장의 학살단 대장을 만났다. 그와 그의 동료는 나를 자기들이 만오백 명을 죽이는데 협조한 스네이크 강가의 빈터로 데려갔다. 그 둘이 자신들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자랑을 할 때 나는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렇게 우연히 람리를 죽게 한 살인자 중 한 명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만남에 대해 아디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디와 가족들은 그 영상을 보고 싶어 했고, 결국 영상 때문에 람리가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 후 2003년부터 2005년까지 2년 동안, 나는 북 수마트라 시골부터 도시까지 전역에 걸쳐 학살단과 명령을 내린 윗선의 가해자를 모두 촬영했다. <액트 오브 킬링>의 안와르 콩고 역시 내가 촬영한 41번째 가해자였다. 이후 5년간 나는 <액트 오브 킬링>을 촬영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아디가 보고 싶어 하는 촬영분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본 아디는 공포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떨었다.
보통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을 부정하거나 변명한다. 왜냐하면 촬영하는 시기에는 보통 이미 그들에게서 권력이 사라지고 그들이 저지른 짓은 규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만나서 촬영한 학살의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을 칭송하고 그걸 바탕으로 조성한 공포 위에 세워진 정권에서 여전히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짓이 옳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라는 요구를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이것이 <액트 오브 킬링>이 50년 전에 일어난 학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공포 정권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이다. <액트 오브 킬링>은 역사적인 서술을 하고 있지 않다. <액트 오브 킬링>은 역사이자 그들이 저지른 짓을 정당화하기 위해 승자가 만들어낸 거짓이며, 그 거짓말의 결과 그 자체이다. <액트 오브 킬링>은 현재를 사로잡고 있는 풀리지 않은 고통스러운 과거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나는 <액트 오브 킬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현재에 대해 동등한 시선을 가진 다른 다큐멘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액트 오브 킬링>은 이젠 죽어서 존재하지 않는 희생자의 영혼에 사로잡힌 다큐멘터리이다. 거의 모든 뼈아픈 흐름은 조용하고, 비어있는, 종종 사라져버린 외로운 영혼들이 사는 파괴된 풍경 장면에서 갑작스레 끝나버린다. 시간이 멈추고 급작스럽게 침묵으로 옮겨가며, 죽은 자를 위한 기념비와 의미 없이 파괴된 인생들로 영화의 시선 속에는 파열이 생긴다. 나는 금세 다음 다큐멘터리를 찍을 거라는 걸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인 자들로부터 감시당하며 삶을 이어나가라고 강요받는 것이 생존자들에게 어떤 일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다큐멘터리 말이다. 그 영화가 바로 <침묵의 시선>이다.
아디가 본 2003년에서 2005년까지의 촬영분을 제외하고, <액트 오브 킬링>을 편집만 한 상태로 (인도네시아로 안전하게 입국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2012년에 <침묵의 시선>을 촬영했다. 우리는 촬영을 하면서 아디와 그의 부모님과 친해져 마치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다.
아디는 오랜 시간 동안 영상 속의 가해자들을 살펴보았고 충격과 슬픔과 분노에 휩싸였다. 아디는 그런 경험을 이해하고 싶어 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아이들은 학교에 다녔고 학교에서는 그의 아이들에게 노역, 고문, 살인 그리고 정치적 아파르트헤이트 같은 것들은 그들이 당해야만 하는 합당한 것이었으며 그들과 생존자들의 자식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디는 가해자들의 으쓱거림과 그의 부모님이 평생을 안고 살아가는 고통과 공포, 그리고 세뇌당하는 아이들을 보며 크게 영향을 받고 분노했다. 아디는 생존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는 자기 형의 죽음에 연루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희생자의 동생이라는 것을 밝히며 가해자 본인들이 인간을 죽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길 바랐다.
<액트 오브 킬링>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인도네시아에서 희생자가 가해자들을 만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전례가 없는 일을 감행했다. 아직도 권력을 가지고 있는 가해자들을 희생자가 대면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고위에 있는 가해자를 만날 때면 우린 아디와 덴마크 스태프, 촬영기사, 그리고 프로듀서만 데려갔다. 가해자가 경찰이나 폭력배가 우리를 쫓아오지 못하게 하려고 아디는 신분증을 들고 가지 않았고, 우린 휴대폰 속의 모든 전화번호를 삭제했으며 자동차도 두 대를 준비해서 촬영 후 돌아갈 때는 중간에 재빨리 차를 바꿔 탔다. 그러나 가해자들과의 대면에서 폭력적인 사태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디의 인내심과 감정 이입하는 능력은 물론이었고, 가해자들이 나를 몇 년간 알고 지냈기 때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상황 파악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긴 해도 가해자와의 대면은 항상 긴장이 흘렀다. 아디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들, 그러니까 생존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공포에서 태어난 억압된 침묵의 윤곽을 인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계속해서 이야기해주었다.
[ THE RELEASE OF THE LOOK OF SILENCE IN INDONESIA ]
<액트 오브 킬링>의 인도네시아 첫 상영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결국엔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상영하고 인터넷을 통해 인도네시아어판의 <액트 오브 킬링>을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도록 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침묵의 시선>은 2014년 11월 10일에 인도네시아 인권 위원회와 자카르타 예술 협회에서 초청을 받아 인도네시아의 가장 큰 극장에서 상영했다. 자카르타 시내에는 영화 홍보 배너가 걸렸고 극장엔 수용할 수 있는 관객 수보다 두 배나 많은 관객이 모여서 주최자는 두 번째 상영 일정을 잡아야 했다. 그리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 예고 없이 아디가 무대 위로 등장했을 때 관객들은 10분간 갈채를 보냈다.
<액트 오브 킬링>은 <침묵의 시선>이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 만약에 <액트 오브 킬링>이 인도네시아 언론과 대중에게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학살을 학살로서 받아들이고 이야기하라고 한 작품이라고 한다면, <침묵의 시선>은 사회라는 천이 어떻게 갈가리 찢어져 있으며 얼마나 처절하게 인도네시아인들이 진실과 화해와 정의와 치유를 원하는지 보여준다.
2014년 12월 10일, 세계 인권의 날에 이 작품은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개봉했다. 만 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이 전국 수백 개의 극장에서 이 작품을 보았고 전국에 상영 포스터를 붙였다. 메단의 큰 상영관에서는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롭게 상영되었다. 아디는 극장에 참석할 때마다 그가 보여준 용기에 대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수많은 트윗이 그를 인도네시아의 영웅으로 칭송했고 인도네시아의 젊은이들은 그들이 기만당했다는 것에 큰 분노를 느끼며 진실과 화해라는 것이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하는지 아디의 모습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상영 3주 차에 <침묵의 시선>은 인도네시아 전역에 34개 도(道) 중 32개 도의 116군데 도시에서 950회 상영되었다. <침묵의 시선>과 <액트 오브 킬링>이 만들어진 도시인 메단에서 수없이 많이 상영되었고 극장, 대학, 영화 모임, NGO, 종교 협회, 지역사회 모임에서 역시 상영이 이루어졌다. 그 모든 곳의 총 관람객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5만3천 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매일 상영이 되고 새로운 예약이 주에 20회꼴로 들어왔다.
언론의 반응은 뜨거웠다. 베니스국제영화제 상영 이후 731개의 기사가 났고 TV 방송에 나왔다. 자카르타 글로브의 독자가 뽑은 ‘올해의 인물’에 새 대통령과 자카르타 시장에 이어 <침묵의 시선>의 스태프가 3위에 올랐다.
<침묵의 시선>은 12월 중순부터 후까지 인도네시아 올해 최고의 영화로 선정되어 수많은 인도네시아 언론에 오르내렸다.(이것은 <액트 오브 킬링>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액트 오브 킬링> 특별판을 만들었던 ‘탬포 매거진’은 15페이지를 할애하여 베니스, 텔룰라이드, 토론토영화제 프리미어 상영에 대해 소개했다. 그리고 2014년 12월 10일 톰 우달 미국 상원의원은 미국의 영향력 아래 이루어진 학살에 대한 문서를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이에 사과하라는 상원 결의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침묵의 시선>은 결국 반발을 일으켰고, 12월 10일 전국 상영 얼마 후 경찰과 군대가 용역 깡패들을 불러 극장을 공격하겠다는 협박을 하기에 이르렀다. 경찰이나 군대는 종종 상영 주최자들에게 접근해 폭력 사태에 대해 경고하며 ‘폭력 방지’(대부분 폭력을 일으키는 장본인들은 경찰이나 군대 본인들이었다.)를 위해 상영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식으로 큰 도시에서부터 작은 도시까지 25번의 상영이 취소되었다.
이런 식의 검열에 대한 분노는 경찰이라면 용역 깡패들에게 고개를 숙이기보다는 표현의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는 설득력 있고 용기 있는 요구로 발현되었다. 수많은 사설과 담화들이 용역 깡패들은 경찰들에 의해서 조직됐다고 소리 높여 말했다. 가장 격렬한 반응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학교 중 하나인 대학의 총장, 인도네시아 인권 위원회, 독립 언론인 연합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수준 있는 언론사 편집자들에게서 나왔다. 인도네시아 내무부 장관은 상영을 방해하는 용역 깡패들에 반대하는 지지 성명도 발표했다.
군대와 용역 깡패들이 말랑에서 몇 번의 상영을 취소시킨 후에, 동 자바 어느 도시의 경찰은 공식적인 기관에 <침묵의 시선>을 검열할 것을 요청했다. 그 요청에 대한 대답으로 검열 기관은 <침묵의 시선> 대중 영화관 상영을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그리고는 수하르토 정권에나 있었을 법한 논거를 내세웠다. <침묵의 시선>은 공산당 이론에 공감을 불러일으킬 위험성이 있고, 다큐멘터리 속의 인물은 공산당원의 자식이기 때문에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사실 아디의 식구 중 누구도 공산당원이 아니고, 그런 거짓 발표는 생존자에게 낙인을 찍는 아주 오래된 방식 중 하나이다.
언론은 분노했다. 인도네시아의 주요 신문은 ‘민주주의 정신을 배반하는 영화 검열’이라고 헤드라인을 내걸며 비난했다. 국가 인권 위원회는 그 결정은 무효이고 불법이며 상영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표명하는 서한을 발행했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마침내 <침묵의 시선>은 조코위 인도네시아 대통령에게 전달되었고, 그의 진보적인 보좌관들과 지지자들은 대통령에게 <침묵의 시선>을 보라고 권했다.
[ THE 1965-1966 MASSACRES IN INDONECIA ]
By 역사학자 존 로사(John Roosa) & 조슈아 오펜하이머(JOSHUA OPPENHEIMER)
1965년 인도네시아 정부는 군대에 의해 전복당했다. 인도네시아의 첫 번째 대통령이자 비동맹 운동의 설립자, 네덜란드 식민주의에 대항한 국가 혁명의 지도자인 수카르노는 물러나고 수하르토 장군의 보수 정권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네덜란드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핵심 단체로서 투쟁을 벌였던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은 수하르토 대통령(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을 지지했으나 수하르토가 정권을 잡으면서 바로 외면당했다.
쿠데타 전날까지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공산국가를 제외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당이었다. 선거를 통해 공식적으로 정권을 잡았고 인도네시아 전체 노동조합을 포함하여 소작농 협동조합들과 연계하였다. 그들에게 가장 큰 안건은 농지 개혁과 외국인 소유의 탄광, 석유, 농장 회사들이었다. 그들은 300년 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으며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던 인도네시아 국민의 이익을 위해 방대한 천연자원을 되찾아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65년 군사 쿠데타 이후, 군사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은 공산주의자로 몰렸으며, 노동조합, 소작농, 지식인들, 중국인을 포함해 식민지 시대의 후유증과 불평등한 부의 분배에 고통받던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일 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서방 세계의 적극적 지원을 받으며 백만 명에 가까운 소위 ‘공산주의자’들이 살해당했다. 미국에서는 이 대량학살을 공산주의에 대항한 승리로 대서특필하며 기념했다. 타임지는 ‘아시아에서 일어난 최고의 소식’이란 기사를 실었고, 뉴욕 타임즈에는 ‘아시아의 빛줄기’라는 헤드라인 기사가 나갔으며 이들을 지지하는 워싱턴 정부를 찬양했다.
(중국 정부와 인도네시아 정부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서 미국 정보부 CIA는 18~19세기에 인도네시아로 이주한 중국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도록 조장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 그와 연관된 노동조합, 협동조합의 일원인 농촌 마을 사람들 대한 학살은 모두 미국의 지지 속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은 공산주의 ‘초토화’ 없이는 새로운 인도네시아 정부 역시 결국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기반을 두게 될지도 몰라서 두려워했다)
인도네시아의 많은 지역에서 살상을 위해 시민들을 동원했고 준군사조직을 조직해 군대의 지지를 받으며 기본적인 훈련까지 받게 하였다. 북 수마트라 지역과 다른 지역에서 준 군사조직은 대부분 조직폭력배로 이루어졌다. 대량학살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는 ‘공산주의자들 처단’을 애국 투쟁으로 포장했고 준군사조직과 조직폭력배를 영웅으로 대접했다. 그 결과 그들은 ‘권력’이라는 대가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조직폭력배들과 심복들은 권력을 잡고 반대자들을 처리했다. 1965년-1966년에 벌어진 대량학살의 핑계는 1965년 10월 1일 밤 여섯 명의 군인 장군들의 암살이었다.
1965년 10월 1일, CIA에 매수된 우익 군부 세력에 대해 불만을 품은 인도네시아의 젊은 영관급 장교들이 조직한 9.30 거사에서 여섯 명의 인도네시아 장군들이 암살당했다. 그들은 그 시체를 도시의 남쪽 우물에 던져버렸고 동시에 9.30 거사의 군대는 국가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하여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우익의 군대 도당으로부터 수카르노 대통령을 보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그런 거사가 일어났는지 알기도 전에 패배했다. 암살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수하르토 장군이 빠른 반격을 펼치며 하루 만에 자카르타에서 거사를 일으킨 군대를 몰아냈기 때문이었다.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거사의 배후라고 지목하며 비난했고 공산당과 연루된 사람들의 처단을 비밀리에 지휘했다. 수하르토의 군대는 1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사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했다. 이로 인해 일어난 이 학살은 20세기의 가장 끔찍한 피의 잔치 중에 하나로, 수십만의 사람들이 자바 중심부, 동 자바, 발리 그리고 북 수마트라에서 군대와 민병대에 의해 대략 1965년 말부터 1966년 중반까지 대량학살 되었다. 국가 재난 속에 수하르토는 점차 권력을 찬탈하기 시작했고, 1966년 3월에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대량학살은 그들의 표면적인 명분이었을 뿐이다. 9.30 거사는 소수에 의해 조직된 작은 규모의 음모였고 이 사건으로 총 12명이 죽었다. 그러나 수하르토는 이것을 과장하여 전국 규모의 음모론으로 만들며 100만 명의 대량학살을 주도했다. 심지어 시골에 살면서 글도 모르는 소작인까지도 거사의 책임을 묻는 살인자로 내몰리며 공산당과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군부 조직은 1998년 정권을 떠나기 전까지 약간이라도 위험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공산당을 철저히 금지했다. 정권 내부에서 논의된 주요 쟁점은 ‘공산주의에 잠재된 위험성’이었다. 이 끝나지 않은 공산당 박멸은 수하르토 정권의 존재 이유였다. 30년 이상 인도네시아를 지배한 정권이 초창기에 했던 합법적 행동은 수하르토 대통령이 1965년 10월 3일에 내린 ‘질서 회복’이란 명령이었다. 그것은 긴급 명령이었다. 그러나 수하르토에게 이 ‘긴급’은 영원히 계속되었다.
수하르토는 자신의 독재정권에 정당한 이데올로기를 세우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9.30 거사를 쳐부순 국가의 구원자로 포장했다. 그의 정권은 교과서, 기념관, 거리의 이름, 영화, 박물관, 기념행사, 국경일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선동선전을 하면서 대중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수하르토 정권은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형언할 수 없는 악마로 묘사하고 역사의 중심에 9.30 거사를 놓으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했다. 그리하여 수하르토 정권 아래에서 반 공산주의는 신성한 의례, 성지를 갖춘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
대규모로 벌어지는 반공산주의 폭력이 인도네시아에 받아들여지는 풍경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살인을 저지른 군인과 민간인 둘 다 그에 대한 책임을 외면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더라도 적게나마 이미 알려진 사실을 봤을 때 군부가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고, 고위층 관료에서부터 살인이 나왔으며, 끊임없는 폭력이 행사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9.30 거사에 대한 가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언론을 장악한 수하르토 관료 패거리들은 공산당이 다시 싸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대중 사이에 심었다. 만약에 군부에 의한 이러한 의도된 도발이 아니었다면, 대중들은 공산당을 9.30 거사 후에 힘을 잃고 언젠가 스스로 사라질 정당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었다. (군부는 1965년 10월 초 이후부터 공산당을 향한 분노를 계속 자극했고 미국 정부는 적극적으로 인도네시아 군부를 지지했다) 군부는 민병대가 나서야 한다며 계속 자극했고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었으며 군수 물자를 지원해주었으나, 그들의 주장대로 광분한 폭력을 행사하는 농촌 마을 사람들은 전혀 없었다.
수하르토의 군대는 공공의 사형보다는 의문의 실종을 택했다. 군대와 민병대들은 대규모 대량학살을 비밀리에 저질렀다. 그들은 밤에 감옥에서 포로들을 데리고 멀리 떨어진 장소로 가 죽이고는 강에 버리거나 큰 구덩이를 파서 대량으로 묻었다.
인도네시아 현대 역사의 비극은 군대가 저지른 1965-66년 대량 학살뿐 아니라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통치 관리로서 대량학살과 심리전을 보는 살인자들의 권력 성장에 있다. 여섯 명의 군사 장교의 시체가 버려진 우물 옆에 지어진 기념관에 허리를 구부리고 추모하면서 스스로 합법화하는 정권은 오히려 나라 전체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집단 대형 무덤들을 남겼다. 그와 비슷하게 1975년과 1999년 사이에 일어난 동티모르 점령에서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묻어버렸다. 인도네시아 군도에 있는 대형 무덤들 하나하나는 독단적이고, 비밀스러운 공권력을 보여준다.
비교적 작은 사건(9.30 거사)에 대한 집착과 역사적으로 거대한 사건(1965-66년 대량학살)의 말소는 사라진 희생자 가족들에 대한 감정이입과 공감을 막아 왔다. 1965년 10월 1일에 여섯 명의 군사 장군들의 시체가 버려진 우물 옆에 기념비가 세워졌으나 진압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수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대형 무덤들 옆에는 어떤 기념비도 찾을 수 없다.
1965년 9월 30일에 누가 장군들을 죽였는지에 대해 집중하면서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죽인 사건에 대한 관심을 교란시킨다. 수하르토의 정권은 장군들을 죽인 잔인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끝없는 선동선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오늘날 대량학살에 대한 대부분의 토론은 장군을 죽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토론으로 대체된다. ‘누가 장군들을 죽였냐’라는 토론은 나에게 너무나 기괴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 사건은 <액트 오브 킬링>에 나오지 않는다.
르완다의 대량학살은 후투족인 르완다의 대통령 쥐베날 하브자리마나가 키갈리로 가던 중 비행기가 저격당하면서 촉발되었다. 그 후 100일 동안 일어난 8만 명의 투치족와 후투족 대량학살보다 누가 비행기를 저격하였는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비양심적이다. 비슷하게 누가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저질렀는지는 홀로코스트를 이해하는데 전혀 무관하다. 불만을 가진 군사 장교들이 여섯 명의 장군들을 죽인 것이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명령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세계 역사에 남을 끔찍한 대량 학살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일 뿐이다. 만약에 르완다에서 1994년에 누가 대통령의 비행기를 저격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했다고 상상해보자. 이것은 그 살인자가 아직도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 EPILOGUE ]
어쨌든 우리는 그런 일을 겪었어
그렇게 된 거야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다들 왔다가 그렇게 지고 말지
-<침묵의 시선> 중-
나는 왜 노래를 하는가
아픈 가슴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서 노래하지
어차피 끊어질 것을 알고 있으면서
무엇 때문에 물레에 실을 잣고 있는가
어차피 가슴만 아플 뿐인데
무엇 때문에 묻어 둔 기억을 들춰내는가
-<침묵의 시선> 중-
[ CHARACTER RELATIONSHIP ]
"저는 당신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에요.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려고 온 거예요"
아디
대학살의 피해자 ’람리’의 8번째 동생.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학살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는 가족의 모습과 대학살을 정당화시키며 가해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아디는 공포와 분노, 슬픔과 희망을 품고 직접 대학살 가해자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넌 형을 빼닮았어. 신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지.
네가 없었다면 난 미치고 말았을 거야."
로하니
’아디’와 ’람리’의 어머니. 친아들을 죽인 사람들과 한 동네에서 침묵하며 살아야 했던 인물로, 늘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있다.
"나는 왜 노래를 하는가. 아픈 가슴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서 노래하지"
루쿤
’아디’와 ’람리’의 아버지. ’람리’의 죽음 이후 끔찍했던 트라우마에 갇혀 자신을 늘 17살이라고 인식한다.
"공산주의자는 신앙심이 없어.
우리 이슬람교는 살인을 인정하지 않지만, 적은 죽일 수밖에 없지"
이농
’람리’의 살해에 직접적인 가담자.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에 대해 정치적인 의무였다고 믿는다. 대학살이 이루어졌던 장소에서 웃으며 살인을 증언하는 등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
"람리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겠지만, 우리가 어쩌겠어? 그땐 혁명의 시대였다고"
아마르 하산
’람리’의 죽음에 또 다른 가담자. 과거 자신의 행동은 더 좋은 역사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확신한다. ’이농’과 더불어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을 뿌듯해 하며 거침없이 증언한다.
"지금이 그때라면 자네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몰라"
아마르 시아한
과거 대학살의 살인 부대를 이끌던 사령관. 매일 밤 공산주의자들의 살생부에 사인을 하며 대규모 학살을 주도했다.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들이 저질렀던 일들을 영웅적인 투쟁이라고 말하며, 살인에 대해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
"백만 명이 죽었지만 그렇게 큰 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M.Y. 바스룬
대학살 살인 부대의 서기관. 현재 인도네시아의 지방 의회 대변인으로, 과거의 일은 정부가 시킨 것이 아니라 공산당을 싫어했던 국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그냥 지키기만 했지."
아디의 삼촌
대학살 당시, 공산당으로 몰려 끌려온 사람들을 수용소에 가둬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수용소에는 ’람리’도 투옥되어있었지만, 자신은 직접 살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때는 미친 사람이 아주 많았지. 다들 미치지 않기 위해 피를 마셨어."
삼실
대학살의 가담자. ’아디’와의 인터뷰에서 공산당이라 여겼던 중국인의 머리를 베어 중국인들을 놀라게 한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한다.
"아버지를 용서해주세요. 당신 아버지뻘의 노인일 뿐이니까요"
삼실의 딸
아버지는 공산당을 물리친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아디’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아버지의 만행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 ’아디’에게 대신 사과를 하면서도, 동시에 가족이란 이름으로 아버지에 대한 선처를 부탁한다.
"지난 일은 잊어요. 그때를 교훈 삼아 잘 지내면 되죠"
아마르 하산의 유족
’아디’와의 인터뷰에 불편함을 느끼고 심한 거부감을 보인다. ’아마르 하산’의 과거는 자신들과 상관없다고 말한다.
[ DIRECTOR’S NOTE ]
<액트 오브 킬링>은 공포와 거짓 위에 세워진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를 드러냈고, <침묵의 시선>은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그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침묵의 시선>에 두 명의 전 학살단 대장이 나를 북 수마트라의 스네이크 강둑으로 데리고 가는 장면이 있다. 그 강둑 빈터에서 그 둘은 자신들이 군인들을 도와 어떻게 만오백 명의 사람들을 죽였는지를 신이 나서 몸소 재연까지 하며 보여줬다. 그 장면 마지막에는 두 사람은 그곳에서의 행복했던 기억을 추억하며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 장면을 찍었던 당시는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끔찍했던 기억 중의 하나이고, 그것을 시작으로 나는 이 두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었다.
사실 나를 정말로 무섭게 만든 것은 학살 자체가 아니라 그 두 사람이 미리 만나서 말을 맞춘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 두 사람은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신나게 떠들며 자랑했고 거기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때 나는 이러한 거리낌 없음이 사회 전체에 만연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두 작품을 1965년에 발생한 사건에 대한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학살이 가져온 결과를 보여주는 현재에 대한 다큐멘터리’라고 말한다. 그렇게 나온 첫 번째 작품이 <액트 오브 킬링>이 되었고 이 다큐멘터리는 거짓으로 포장된 사회 속에 사는 가해자들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침묵의 시선>은 50년 동안 공포와 침묵 속에 살 때 사회 전체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말하는 다큐멘터리이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에 관한 영화는 대부분 그들을 영웅 같은 주인공으로 만드는 진부함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가해자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알고 있고, 현재의 우리는 그런 끔찍한 재앙과는 무관한 안전한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우리는 가해자들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편’이다라는 안도감을 가지려고 생존자를 영웅으로 그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기 위해 생존자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존자들의 뼈 아픈 과거를 모욕하는 짓인 동시에 재앙 속에서 살아남아 폭력 속에 갈가리 찢긴 삶을 유지하며 공포 속에서 침묵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흔한 진부함 속에서 똑바로 길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침묵 그 자체를 들여다봐야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침묵의 시선>은 공포 속의 침묵에 대한 한 편의 시이다. 그 시는 침묵을 깨야 하는 필요성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침묵이 깨졌을 때 드러나는 고통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 영화는 침묵에 대한 기념비일지 모른다. 그 기념비는 우리에게 아무리 우리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를 원하고, 외면하고, 다른 일로 덮어버리고자 하더라도 파괴된 것은 원상 복귀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우리는 나아가는 것을 멈춰야 한다. 멈춰서 파괴된 삶을 알아차리고, 그 파괴된 삶이 가져오는 침묵에 안간힘을 쓰며 귀 기울여야 한다.
[ ABOUT MOVIE ]
2014 베니스국제영화제 5관왕 석권!
전 세계 37개 영화상을 휩쓴 전대미문의 마스터피스!
<침묵의 시선>의 경이로운 수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 세계 70개 이상의 영화상을 휩쓸며 해외 유력 매체와 평단의 극찬 세례를 끌어낸 <액트 오브 킬링>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이 이번엔 그보다 더욱 대담하고 과감한 신작 <침묵의 시선>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세계 영화계에 거대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침묵의 시선>은 1965년 인도네시아 100만 명 대학살 사건으로 형을 잃은 ‘아디’가 50년 후 자신의 형을 죽인 사람들을 찾아가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는 도발적인 방식의 다큐멘터리로, 공개된 직후 전작 <액트 오브 킬링>을 이어 올해에도 역시 아카데미시상식 최고 다큐멘터리부문의 유력 후보로 점쳐지고 있다. 위험천만하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하며 해외 유력 매체와 평단의 폭발적인 찬사를 끌어낸 <침묵의 시선>은 2014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 국제비평가협회상, 인권의밤상, 골든마우스상, 유럽비평가협회상을 받으며 5관왕을 석권한 데 이어 2015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평화영화상을,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부산시네필상을 수상하는 등 일찌감치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37개의 영화상을 휩쓸었다. 그뿐만 아니라 2015년 토론토영화제 공식 초청, 텔룰라이드영화제 공식 초청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영화제로부터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고 있어 70개 이상의 영화상을 휩쓸었던 <액트 오브 킬링>의 유례없는 아성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올해 단 한 편의 영화를 본다면 이 영화를 보라!
현재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메이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충격적 문제작!
공포 속의 침묵에 대한 한 편의 시 <침묵의 시선>
국내 개봉 확정과 동시에 절대 놓쳐선 안 될 올해의 마스터피스로 씨네 필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침묵의 시선>은 단 두 편으로 영화사를 뒤흔들며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자리 잡은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충격적인 신작이다. 1965년에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났던 100만 명 대학살 사건에 대한 집요하고 깊이 있는 통찰로 ‘학살은 학살로서 직시해야 한다’는 사회적 화두를 던졌던 전작 <액트 오브 킬링>에 이어 이번 <침묵의 시선>은 학살이라는 참사 위에 세워진 거짓된 사회가 어떻게 찢어져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진실과 화해, 그리고 정의를 얼마나 바라는지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파렴치한 가해자에게 분노를 느끼도록 만들었던 <액트 오브 킬링>과는 달리 <침묵의 시선>은 분노하던 이들이 직접 일어나 행동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또 하나의 뜨거운 문제작을 가지고 나타난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을 향해 해외 유력 매체와 평단은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하고 강렬한 다큐멘터리다.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실로 깊은 통찰!(Errol Morris)”, "차라리 이 영화를 보지 말았어야 했다.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다.(Wall Street Journal)", “마음을 사로잡는 오펜하이머의 무한한 스토리텔링 능력(Playlist)”, “긴 밤 끊임없이 울리는 매미 소리처럼 머릿속을 맴도는 강렬한 영화(Peter Howell)”,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 진정한 예술작품!(Huffington Post)”, “절대 잊혀선 안 될 21세기 가장 중요한 다큐멘터리(Twitch)” 등 동시대에 만날 수 있는 가장 강렬하고 완성도 높은 다큐멘터리라는 찬사를 보냈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이 그간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침묵의 시선>은 현 정권을 고발하는 영화가 아닌 침묵을 강요당한 사람들에 대한 영화”임을 밝혀왔던 만큼, <침묵의 시선>을 통해 관객들은 단순히 감춰진 역사를 인식하고 분노하는 것뿐만 아니라, 알고 있었지만 두려워 피해왔던 진실을 바로 마주하고 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만약 지금이 그때였다면 저한테 어떻게 하셨을까요?”
피해자는 묻고, 살인자는 답한다!
50년의 숨 막히는 침묵을 깨는 위험천만 파격 인터뷰!
<침묵의 시선>은 안경사 ‘아디’가 친형 ‘람리’를 죽인 살인자들을 50년 만에 직접 찾아가 학살에 관해 묻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자칫 피해자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다큐멘터리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지만 <침묵의 시선>은 피해자의 ‘입장’을 그리며 감정적 동요나 동정을 구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의 시선을 빌려 학살로 인해 야기된 결과와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다. 주인공인 아디의 형 람리는 인도네시아 대학살에서 무척 중요한 이름이다. 소리소문없이 실종 처리되어 사라졌던 100만 명의 인물 중 유일하게 목격자를 가진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학살이 모두 끝난 후에야 태어난 아디는 모든 것이 망가진 가정 안에서 살며 학살로 인한 트라우마를 가져야 했지만, 그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쉽게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복수를 꿈꾸는 대신 차분하고 담담하게 가해자에게 당시의 학살에 관해 묻고 그들이 자랑스럽게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떠드는 동안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자신이 바로 그 학살의 피해자 가족임을 밝히는 순간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던 공포와 숨 막히는 긴장감이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온다. <침묵의 시선>은 살기 위해 침묵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그러한 사회를 외면하고 책임을 회피하던 이들로 하여금 50여 년의 침묵을 깨게 만드는 전례 없는 다큐멘터리로 묵직한 여운을 선사할 예정이다.
아이러니에서 기인한 기묘하고 아름다운 영상미,
정적인 이미지에 숨겨진 강렬하고 소름 끼치는 공포!
격정적인 감정의 파도를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다큐멘터리!
화려한 색감과 초현실적인 비주얼로 무장한 채 대학살을 재연하는 살인자들의 이야기로 감각적인 미장센을 선보였던 <액트 오브 킬링>과는 달리 <침묵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으로 정적미를 뽐낸다. 그러나 이러한 미학적 이미지를 앞세운 <침묵의 시선>은 피해자가 직접 가해자를 찾아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던 인도네시아 100만 명 대학살이라는 주제에 관해 인터뷰하는 파격적인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뜻밖의 공포를 선사한다. 조용한 밤에 울리는 풀 벌레 소리와 호젓한 시골 풍경, 그리고 단지 응시하는 듯한 카메라의 시선은 살아남은 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학살과 죽음의 공포를 비추고 아직도 인도네시아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폭력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이렇게 아름다운 영상 속에 숨겨진 소름 끼치도록 잔인한 이야기는 이미지와 메시지의 틈을 벌리며 그 모순에서 기인하는 독특한 분위기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특히, 생생하고 다채로운 색감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를 말없이 바라보는 아디의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시선이나,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아들을 떠올리며 과거 속에 갇혀 사는 노부모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도리어 뻔뻔하고 파렴치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가해자의 모습과 병치 되어 격정적인 감정의 파도를 불러일으킨다. 아이러니에서 기인하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영상미로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새로운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은 역대 가장 고요한 충격을 안기며 선명하고 강렬한 후유증을 남길 것이다.
[ DIRECTOR’S PRODUCTION NOTE ]
난 2001년에 인도네시아에 처음 갔다. 노동조합이 불법이었던 수하르토 독재 정권이 끝난 후 야자유 농장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세우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것을 도와주러 갔었는데, 북 수마트라 오지 마을에서는 이미 3년 전에 군부 독재가 끝났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1965년까지 활동적인 노동조합을 갖고 있었던 그들은 유난히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는 곧 그 공포의 원인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들의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이 공산당 찬동 자라는 누명을 쓰고 강제수용소에 감금당하고 결국에는 군인과 학살단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2001년 당시 살인자들은 면죄부를 받은 것은 물론이요, 의회에서부터 농장 마을회까지 요직을 갖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생존자들은 대학살이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 속에 살고 있던 것이다.
<글로벌리제이션 테이프>(2002)를 완성한 후 생존자들은 우리에게 어서 돌아가서 그들이 느끼는 공포의 근원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즉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권력을 누리며 사는 살인자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야 하는 생존자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한 것이다.
2003년 초 우리는 서둘러 돌아가서 농장 노동자들이 자주 입에 올렸던 1965년에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희생자의 이름은 ‘람리’였고, 사람들에게 람리라는 이름은 곧 학살을 뜻하고 있었다.
나는 람리에 대한 살인이 왜 그리 자주 언급되는지 곧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증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제 수용소에서 한밤중에 사라진 다른 수천수만 명의 희생자와는 달리 살인자들은 람리의 시신을 그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야자수 농장에 버리고 가버렸고, 그런 람리의 마지막 순간을 목격한 증인들이 있었다.
생존자들과 보통의 인도네시아인들이 람리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그의 죽음은 사라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증거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65년에 벌어진 학살이 아무리 금기시되었다 하더라도 람리는 살인이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의 죽음은 군부정권이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살라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협박하고 있다는 공포를 확인시켜주었다. 람리와 그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눈을 뜨고, 진실을 상기하고, 과거를 기념하고, 미래를 향해 경고해야 한다고 스스로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 생존자와 농장 사람들에게는 람리를 기억하는 것은 공포의 근원을 일깨우는 것이며, 그것은 그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첫걸음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내가 2003년에 인도네시아에 돌아갔을 때, 람리의 사건이 자주 언급될 수밖에 없었다. 농장 노동자들은 금방 그의 가족을 찾아주었고 람리의 어머니 로하니와 노쇠했지만 장난기 많은 아버지 루쿤, 그리고 학살 후에 태어난 막내아들 아디를 소개해주었다.
로하니는 아디의 탄생을 죽은 아들 람리가 다시 태어난 것처럼 여겼다. 아디의 존재는 그녀가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고, 아디는 평생을 부담감 속에 살았다. 학살 생존자들의 자식들이 그러했듯 아디는 정치적으로 깨끗하지 않다는 낙인이 찍힌 집안에서 지역 군인들의 금전적 강탈로 인한 빈곤함과 학살의 트라우마 속에 자라났다.
아디는 학살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학살에 대해 말하고 대답을 요구하는데 두려움이 없었다. 나는 그런 아디가 그의 가족이 겪었던 것을 이해하며 나아가는 방법으로 이 작품을 이끌어줄 것으로 생각했고, 그의 주변 사람들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에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던 공포를 표현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이 작품을 인도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바로 아디와 친구가 되어 함께 그 지역의 생존자 가족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우린 그것을 찍었다. 그들이 겪었던 것을 처음으로 입 밖으로 꺼냈던 것이다. 한 번은 생존자 한 명이 람리 부모님 집에 방문했는데 경찰에게 체포되어 노역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증언하기 위해 왔던 것이다. 매번 오토바이와 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촬영을 멈추고 장비를 숨겼다. 경제적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생존자들은 자전거 정도밖에 살 수 없는 경제 상황에 처해있었고, 자동차나 오토바이 소리는 곧 외부 사람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모든 마을에는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그 마을에 있던 군대는 재빠르게 우리가 하는 일을 알아채고 생존자들과 아디의 형제자매들에게 촬영에 협조하지 말라고 협박했다. 생존자들은 나에게 “그만두고 집에 돌아가기 전에 가해자들을 찍어주세요. 그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우리 친인척들을 죽였는지 말해줄 거예요.” 라고 말했다. 나는 가해자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과연 안전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해자 모두가 거리낌 없이 자기들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자기 가족이나 심지어 어린 손자 손녀 앞에서 웃음을 머금고 자랑하고 있었다. 침묵을 강요받는 생존자들과 생존자들이 말하면 범죄로 취급되는 그 일을 자랑스럽게 떠드는 가해자들 사이의 간극에서 나는 마치 홀로코스트 이후 나치가 아직도 권력을 쥐고 있는 독일에 있는 듯했다.
내가 찍은 증언들을 보고 싶어하는 아디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생존자들에게 그 영상을 보여줬을 때 그들은 나에게 “당신은 지금 엄청나게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요. 가해자들을 계속 찍어주세요. 사람들이 이걸 보게 된다면 살인자들이 세워놓은 썩은 정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생존자들과 인권 단체로부터 너무나 위험한 일을 이루어달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가해자들은 적극적으로 자기들이 살인을 저질렀던 장소로 나를 데리고 갔고 어떻게 사람을 죽였는지 자발적으로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소품으로 사용할 칼이나 함께 재연해줄 친구들을 데려오지 않은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불평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글로벌리제이션 테이프>를 만든 농장의 학살단 대장을 만났다. 그와 그의 동료는 나를 자기들이 만오백 명을 죽이는데 협조한 스네이크 강가의 빈터로 데려갔다. 그 둘이 자신들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자랑을 할 때 나는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렇게 우연히 람리를 죽게 한 살인자 중 한 명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만남에 대해 아디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디와 가족들은 그 영상을 보고 싶어 했고, 결국 영상 때문에 람리가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 후 2003년부터 2005년까지 2년 동안, 나는 북 수마트라 시골부터 도시까지 전역에 걸쳐 학살단과 명령을 내린 윗선의 가해자를 모두 촬영했다. <액트 오브 킬링>의 안와르 콩고 역시 내가 촬영한 41번째 가해자였다. 이후 5년간 나는 <액트 오브 킬링>을 촬영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아디가 보고 싶어 하는 촬영분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본 아디는 공포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떨었다.
보통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을 부정하거나 변명한다. 왜냐하면 촬영하는 시기에는 보통 이미 그들에게서 권력이 사라지고 그들이 저지른 짓은 규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만나서 촬영한 학살의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을 칭송하고 그걸 바탕으로 조성한 공포 위에 세워진 정권에서 여전히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짓이 옳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라는 요구를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이것이 <액트 오브 킬링>이 50년 전에 일어난 학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공포 정권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이다. <액트 오브 킬링>은 역사적인 서술을 하고 있지 않다. <액트 오브 킬링>은 역사이자 그들이 저지른 짓을 정당화하기 위해 승자가 만들어낸 거짓이며, 그 거짓말의 결과 그 자체이다. <액트 오브 킬링>은 현재를 사로잡고 있는 풀리지 않은 고통스러운 과거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나는 <액트 오브 킬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현재에 대해 동등한 시선을 가진 다른 다큐멘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액트 오브 킬링>은 이젠 죽어서 존재하지 않는 희생자의 영혼에 사로잡힌 다큐멘터리이다. 거의 모든 뼈아픈 흐름은 조용하고, 비어있는, 종종 사라져버린 외로운 영혼들이 사는 파괴된 풍경 장면에서 갑작스레 끝나버린다. 시간이 멈추고 급작스럽게 침묵으로 옮겨가며, 죽은 자를 위한 기념비와 의미 없이 파괴된 인생들로 영화의 시선 속에는 파열이 생긴다. 나는 금세 다음 다큐멘터리를 찍을 거라는 걸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인 자들로부터 감시당하며 삶을 이어나가라고 강요받는 것이 생존자들에게 어떤 일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다큐멘터리 말이다. 그 영화가 바로 <침묵의 시선>이다.
아디가 본 2003년에서 2005년까지의 촬영분을 제외하고, <액트 오브 킬링>을 편집만 한 상태로 (인도네시아로 안전하게 입국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2012년에 <침묵의 시선>을 촬영했다. 우리는 촬영을 하면서 아디와 그의 부모님과 친해져 마치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다.
아디는 오랜 시간 동안 영상 속의 가해자들을 살펴보았고 충격과 슬픔과 분노에 휩싸였다. 아디는 그런 경험을 이해하고 싶어 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아이들은 학교에 다녔고 학교에서는 그의 아이들에게 노역, 고문, 살인 그리고 정치적 아파르트헤이트 같은 것들은 그들이 당해야만 하는 합당한 것이었으며 그들과 생존자들의 자식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디는 가해자들의 으쓱거림과 그의 부모님이 평생을 안고 살아가는 고통과 공포, 그리고 세뇌당하는 아이들을 보며 크게 영향을 받고 분노했다. 아디는 생존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는 자기 형의 죽음에 연루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희생자의 동생이라는 것을 밝히며 가해자 본인들이 인간을 죽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길 바랐다.
<액트 오브 킬링>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인도네시아에서 희생자가 가해자들을 만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전례가 없는 일을 감행했다. 아직도 권력을 가지고 있는 가해자들을 희생자가 대면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고위에 있는 가해자를 만날 때면 우린 아디와 덴마크 스태프, 촬영기사, 그리고 프로듀서만 데려갔다. 가해자가 경찰이나 폭력배가 우리를 쫓아오지 못하게 하려고 아디는 신분증을 들고 가지 않았고, 우린 휴대폰 속의 모든 전화번호를 삭제했으며 자동차도 두 대를 준비해서 촬영 후 돌아갈 때는 중간에 재빨리 차를 바꿔 탔다. 그러나 가해자들과의 대면에서 폭력적인 사태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디의 인내심과 감정 이입하는 능력은 물론이었고, 가해자들이 나를 몇 년간 알고 지냈기 때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상황 파악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긴 해도 가해자와의 대면은 항상 긴장이 흘렀다. 아디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들, 그러니까 생존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공포에서 태어난 억압된 침묵의 윤곽을 인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계속해서 이야기해주었다.
[ THE RELEASE OF THE LOOK OF SILENCE IN INDONESIA ]
<액트 오브 킬링>의 인도네시아 첫 상영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결국엔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상영하고 인터넷을 통해 인도네시아어판의 <액트 오브 킬링>을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도록 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침묵의 시선>은 2014년 11월 10일에 인도네시아 인권 위원회와 자카르타 예술 협회에서 초청을 받아 인도네시아의 가장 큰 극장에서 상영했다. 자카르타 시내에는 영화 홍보 배너가 걸렸고 극장엔 수용할 수 있는 관객 수보다 두 배나 많은 관객이 모여서 주최자는 두 번째 상영 일정을 잡아야 했다. 그리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 예고 없이 아디가 무대 위로 등장했을 때 관객들은 10분간 갈채를 보냈다.
<액트 오브 킬링>은 <침묵의 시선>이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 만약에 <액트 오브 킬링>이 인도네시아 언론과 대중에게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학살을 학살로서 받아들이고 이야기하라고 한 작품이라고 한다면, <침묵의 시선>은 사회라는 천이 어떻게 갈가리 찢어져 있으며 얼마나 처절하게 인도네시아인들이 진실과 화해와 정의와 치유를 원하는지 보여준다.
2014년 12월 10일, 세계 인권의 날에 이 작품은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개봉했다. 만 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이 전국 수백 개의 극장에서 이 작품을 보았고 전국에 상영 포스터를 붙였다. 메단의 큰 상영관에서는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롭게 상영되었다. 아디는 극장에 참석할 때마다 그가 보여준 용기에 대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수많은 트윗이 그를 인도네시아의 영웅으로 칭송했고 인도네시아의 젊은이들은 그들이 기만당했다는 것에 큰 분노를 느끼며 진실과 화해라는 것이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하는지 아디의 모습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상영 3주 차에 <침묵의 시선>은 인도네시아 전역에 34개 도(道) 중 32개 도의 116군데 도시에서 950회 상영되었다. <침묵의 시선>과 <액트 오브 킬링>이 만들어진 도시인 메단에서 수없이 많이 상영되었고 극장, 대학, 영화 모임, NGO, 종교 협회, 지역사회 모임에서 역시 상영이 이루어졌다. 그 모든 곳의 총 관람객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5만3천 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매일 상영이 되고 새로운 예약이 주에 20회꼴로 들어왔다.
언론의 반응은 뜨거웠다. 베니스국제영화제 상영 이후 731개의 기사가 났고 TV 방송에 나왔다. 자카르타 글로브의 독자가 뽑은 ‘올해의 인물’에 새 대통령과 자카르타 시장에 이어 <침묵의 시선>의 스태프가 3위에 올랐다.
<침묵의 시선>은 12월 중순부터 후까지 인도네시아 올해 최고의 영화로 선정되어 수많은 인도네시아 언론에 오르내렸다.(이것은 <액트 오브 킬링>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액트 오브 킬링> 특별판을 만들었던 ‘탬포 매거진’은 15페이지를 할애하여 베니스, 텔룰라이드, 토론토영화제 프리미어 상영에 대해 소개했다. 그리고 2014년 12월 10일 톰 우달 미국 상원의원은 미국의 영향력 아래 이루어진 학살에 대한 문서를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이에 사과하라는 상원 결의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침묵의 시선>은 결국 반발을 일으켰고, 12월 10일 전국 상영 얼마 후 경찰과 군대가 용역 깡패들을 불러 극장을 공격하겠다는 협박을 하기에 이르렀다. 경찰이나 군대는 종종 상영 주최자들에게 접근해 폭력 사태에 대해 경고하며 ‘폭력 방지’(대부분 폭력을 일으키는 장본인들은 경찰이나 군대 본인들이었다.)를 위해 상영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식으로 큰 도시에서부터 작은 도시까지 25번의 상영이 취소되었다.
이런 식의 검열에 대한 분노는 경찰이라면 용역 깡패들에게 고개를 숙이기보다는 표현의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는 설득력 있고 용기 있는 요구로 발현되었다. 수많은 사설과 담화들이 용역 깡패들은 경찰들에 의해서 조직됐다고 소리 높여 말했다. 가장 격렬한 반응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학교 중 하나인 대학의 총장, 인도네시아 인권 위원회, 독립 언론인 연합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수준 있는 언론사 편집자들에게서 나왔다. 인도네시아 내무부 장관은 상영을 방해하는 용역 깡패들에 반대하는 지지 성명도 발표했다.
군대와 용역 깡패들이 말랑에서 몇 번의 상영을 취소시킨 후에, 동 자바 어느 도시의 경찰은 공식적인 기관에 <침묵의 시선>을 검열할 것을 요청했다. 그 요청에 대한 대답으로 검열 기관은 <침묵의 시선> 대중 영화관 상영을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그리고는 수하르토 정권에나 있었을 법한 논거를 내세웠다. <침묵의 시선>은 공산당 이론에 공감을 불러일으킬 위험성이 있고, 다큐멘터리 속의 인물은 공산당원의 자식이기 때문에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사실 아디의 식구 중 누구도 공산당원이 아니고, 그런 거짓 발표는 생존자에게 낙인을 찍는 아주 오래된 방식 중 하나이다.
언론은 분노했다. 인도네시아의 주요 신문은 ‘민주주의 정신을 배반하는 영화 검열’이라고 헤드라인을 내걸며 비난했다. 국가 인권 위원회는 그 결정은 무효이고 불법이며 상영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표명하는 서한을 발행했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마침내 <침묵의 시선>은 조코위 인도네시아 대통령에게 전달되었고, 그의 진보적인 보좌관들과 지지자들은 대통령에게 <침묵의 시선>을 보라고 권했다.
[ THE 1965-1966 MASSACRES IN INDONECIA ]
By 역사학자 존 로사(John Roosa) & 조슈아 오펜하이머(JOSHUA OPPENHEIMER)
1965년 인도네시아 정부는 군대에 의해 전복당했다. 인도네시아의 첫 번째 대통령이자 비동맹 운동의 설립자, 네덜란드 식민주의에 대항한 국가 혁명의 지도자인 수카르노는 물러나고 수하르토 장군의 보수 정권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네덜란드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핵심 단체로서 투쟁을 벌였던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은 수하르토 대통령(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을 지지했으나 수하르토가 정권을 잡으면서 바로 외면당했다.
쿠데타 전날까지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공산국가를 제외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당이었다. 선거를 통해 공식적으로 정권을 잡았고 인도네시아 전체 노동조합을 포함하여 소작농 협동조합들과 연계하였다. 그들에게 가장 큰 안건은 농지 개혁과 외국인 소유의 탄광, 석유, 농장 회사들이었다. 그들은 300년 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으며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던 인도네시아 국민의 이익을 위해 방대한 천연자원을 되찾아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65년 군사 쿠데타 이후, 군사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은 공산주의자로 몰렸으며, 노동조합, 소작농, 지식인들, 중국인을 포함해 식민지 시대의 후유증과 불평등한 부의 분배에 고통받던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일 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서방 세계의 적극적 지원을 받으며 백만 명에 가까운 소위 ‘공산주의자’들이 살해당했다. 미국에서는 이 대량학살을 공산주의에 대항한 승리로 대서특필하며 기념했다. 타임지는 ‘아시아에서 일어난 최고의 소식’이란 기사를 실었고, 뉴욕 타임즈에는 ‘아시아의 빛줄기’라는 헤드라인 기사가 나갔으며 이들을 지지하는 워싱턴 정부를 찬양했다.
(중국 정부와 인도네시아 정부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서 미국 정보부 CIA는 18~19세기에 인도네시아로 이주한 중국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도록 조장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 그와 연관된 노동조합, 협동조합의 일원인 농촌 마을 사람들 대한 학살은 모두 미국의 지지 속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은 공산주의 ‘초토화’ 없이는 새로운 인도네시아 정부 역시 결국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기반을 두게 될지도 몰라서 두려워했다)
인도네시아의 많은 지역에서 살상을 위해 시민들을 동원했고 준군사조직을 조직해 군대의 지지를 받으며 기본적인 훈련까지 받게 하였다. 북 수마트라 지역과 다른 지역에서 준 군사조직은 대부분 조직폭력배로 이루어졌다. 대량학살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는 ‘공산주의자들 처단’을 애국 투쟁으로 포장했고 준군사조직과 조직폭력배를 영웅으로 대접했다. 그 결과 그들은 ‘권력’이라는 대가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조직폭력배들과 심복들은 권력을 잡고 반대자들을 처리했다. 1965년-1966년에 벌어진 대량학살의 핑계는 1965년 10월 1일 밤 여섯 명의 군인 장군들의 암살이었다.
1965년 10월 1일, CIA에 매수된 우익 군부 세력에 대해 불만을 품은 인도네시아의 젊은 영관급 장교들이 조직한 9.30 거사에서 여섯 명의 인도네시아 장군들이 암살당했다. 그들은 그 시체를 도시의 남쪽 우물에 던져버렸고 동시에 9.30 거사의 군대는 국가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하여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우익의 군대 도당으로부터 수카르노 대통령을 보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그런 거사가 일어났는지 알기도 전에 패배했다. 암살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수하르토 장군이 빠른 반격을 펼치며 하루 만에 자카르타에서 거사를 일으킨 군대를 몰아냈기 때문이었다.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거사의 배후라고 지목하며 비난했고 공산당과 연루된 사람들의 처단을 비밀리에 지휘했다. 수하르토의 군대는 1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사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했다. 이로 인해 일어난 이 학살은 20세기의 가장 끔찍한 피의 잔치 중에 하나로, 수십만의 사람들이 자바 중심부, 동 자바, 발리 그리고 북 수마트라에서 군대와 민병대에 의해 대략 1965년 말부터 1966년 중반까지 대량학살 되었다. 국가 재난 속에 수하르토는 점차 권력을 찬탈하기 시작했고, 1966년 3월에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대량학살은 그들의 표면적인 명분이었을 뿐이다. 9.30 거사는 소수에 의해 조직된 작은 규모의 음모였고 이 사건으로 총 12명이 죽었다. 그러나 수하르토는 이것을 과장하여 전국 규모의 음모론으로 만들며 100만 명의 대량학살을 주도했다. 심지어 시골에 살면서 글도 모르는 소작인까지도 거사의 책임을 묻는 살인자로 내몰리며 공산당과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군부 조직은 1998년 정권을 떠나기 전까지 약간이라도 위험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공산당을 철저히 금지했다. 정권 내부에서 논의된 주요 쟁점은 ‘공산주의에 잠재된 위험성’이었다. 이 끝나지 않은 공산당 박멸은 수하르토 정권의 존재 이유였다. 30년 이상 인도네시아를 지배한 정권이 초창기에 했던 합법적 행동은 수하르토 대통령이 1965년 10월 3일에 내린 ‘질서 회복’이란 명령이었다. 그것은 긴급 명령이었다. 그러나 수하르토에게 이 ‘긴급’은 영원히 계속되었다.
수하르토는 자신의 독재정권에 정당한 이데올로기를 세우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9.30 거사를 쳐부순 국가의 구원자로 포장했다. 그의 정권은 교과서, 기념관, 거리의 이름, 영화, 박물관, 기념행사, 국경일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선동선전을 하면서 대중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수하르토 정권은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형언할 수 없는 악마로 묘사하고 역사의 중심에 9.30 거사를 놓으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했다. 그리하여 수하르토 정권 아래에서 반 공산주의는 신성한 의례, 성지를 갖춘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
대규모로 벌어지는 반공산주의 폭력이 인도네시아에 받아들여지는 풍경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살인을 저지른 군인과 민간인 둘 다 그에 대한 책임을 외면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더라도 적게나마 이미 알려진 사실을 봤을 때 군부가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고, 고위층 관료에서부터 살인이 나왔으며, 끊임없는 폭력이 행사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9.30 거사에 대한 가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언론을 장악한 수하르토 관료 패거리들은 공산당이 다시 싸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대중 사이에 심었다. 만약에 군부에 의한 이러한 의도된 도발이 아니었다면, 대중들은 공산당을 9.30 거사 후에 힘을 잃고 언젠가 스스로 사라질 정당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었다. (군부는 1965년 10월 초 이후부터 공산당을 향한 분노를 계속 자극했고 미국 정부는 적극적으로 인도네시아 군부를 지지했다) 군부는 민병대가 나서야 한다며 계속 자극했고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었으며 군수 물자를 지원해주었으나, 그들의 주장대로 광분한 폭력을 행사하는 농촌 마을 사람들은 전혀 없었다.
수하르토의 군대는 공공의 사형보다는 의문의 실종을 택했다. 군대와 민병대들은 대규모 대량학살을 비밀리에 저질렀다. 그들은 밤에 감옥에서 포로들을 데리고 멀리 떨어진 장소로 가 죽이고는 강에 버리거나 큰 구덩이를 파서 대량으로 묻었다.
인도네시아 현대 역사의 비극은 군대가 저지른 1965-66년 대량 학살뿐 아니라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통치 관리로서 대량학살과 심리전을 보는 살인자들의 권력 성장에 있다. 여섯 명의 군사 장교의 시체가 버려진 우물 옆에 지어진 기념관에 허리를 구부리고 추모하면서 스스로 합법화하는 정권은 오히려 나라 전체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집단 대형 무덤들을 남겼다. 그와 비슷하게 1975년과 1999년 사이에 일어난 동티모르 점령에서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묻어버렸다. 인도네시아 군도에 있는 대형 무덤들 하나하나는 독단적이고, 비밀스러운 공권력을 보여준다.
비교적 작은 사건(9.30 거사)에 대한 집착과 역사적으로 거대한 사건(1965-66년 대량학살)의 말소는 사라진 희생자 가족들에 대한 감정이입과 공감을 막아 왔다. 1965년 10월 1일에 여섯 명의 군사 장군들의 시체가 버려진 우물 옆에 기념비가 세워졌으나 진압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수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대형 무덤들 옆에는 어떤 기념비도 찾을 수 없다.
1965년 9월 30일에 누가 장군들을 죽였는지에 대해 집중하면서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죽인 사건에 대한 관심을 교란시킨다. 수하르토의 정권은 장군들을 죽인 잔인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끝없는 선동선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오늘날 대량학살에 대한 대부분의 토론은 장군을 죽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토론으로 대체된다. ‘누가 장군들을 죽였냐’라는 토론은 나에게 너무나 기괴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 사건은 <액트 오브 킬링>에 나오지 않는다.
르완다의 대량학살은 후투족인 르완다의 대통령 쥐베날 하브자리마나가 키갈리로 가던 중 비행기가 저격당하면서 촉발되었다. 그 후 100일 동안 일어난 8만 명의 투치족와 후투족 대량학살보다 누가 비행기를 저격하였는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비양심적이다. 비슷하게 누가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저질렀는지는 홀로코스트를 이해하는데 전혀 무관하다. 불만을 가진 군사 장교들이 여섯 명의 장군들을 죽인 것이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명령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세계 역사에 남을 끔찍한 대량 학살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일 뿐이다. 만약에 르완다에서 1994년에 누가 대통령의 비행기를 저격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했다고 상상해보자. 이것은 그 살인자가 아직도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 EPILOGUE ]
어쨌든 우리는 그런 일을 겪었어
그렇게 된 거야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다들 왔다가 그렇게 지고 말지
-<침묵의 시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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