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어느 시골 마을, 남편과 사별한 안나는 나이 많은 남동생 미하일과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근면한 노동자인 안나와 달리 미하일은 밤낮없이 술에 취해 있다. 감독 코사코프스키는 오랜 관찰을 통해 포착한 어느 결정적인 순간들을 통해 러시아인의 전형성과 삶의 애환을 날카롭게, 하지만 따뜻하게 담아냈다. 카메라 밖, 설명되지 않은 그들의 삶까지 그려내는 아름다운 흑백 화면의 이야기 (2014년 제11회 EBS국제다큐영화제)
리뷰
<벨로프씨 가족들>은 빅토르 코사코프스키의 데뷔작이다. 네바 강이 시작되는 한적한 전원에서 늙은 과부 안나, 그의 오빠로 보이는 미하일이 살고 있다. 안나는 소의 젖을 짜고, 밭을 일구는 등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지만, 아내와 아이들이 곁을 떠나 버린 미하일은 늘 술에 취해 있다. 그리고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철학을 읊어댄다. 어느날 또 다른 형제들인 바실리와 세르게이가 이들을 방문하고, 이들은 밤새도록 러시아의 정치 상황에 대해 논쟁을 펼친다. 그러나 그 논쟁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벨로프씨 가족들>이 연출된 1993년이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직후 보리스 옐친이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으로 역임하고 있던 시점이라는 걸 감안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영화 속의 미카일은 소비에트의 실패한 사회주의 실험에 대한 자조적 절망의 한 풍경을 보는 듯한 모습이다. 그는 삶과 역사의 현장에서 완전히 패배한 초라한 몰골이다. 반면 여전히 건강한 노동을 통해 삶을 일궈가는 안나의 모습은 이데올로기와 사회 체제의 변화를 뛰어 넘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과 의지에 대한 긍정적인 시사점을 안겨준다. 흑백 화면으로 찍은 이 영화는, 도도히 흐르는 물줄기를 비추는 첫 화면이 암시하듯 세월과 역사의 도도한 변화 앞에 무력한 인간들의 삶에 연민 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다. 거기에는 소련의 붕괴를 목격한 빅토르 코사코프스키의 심경이 함께 투영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미카일을 뒤로 한 채 안나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마지막 장면은 길고 깊은 여운을 남길 것이다. (2014년 제11회 EBS국제다큐영화제 최광희)